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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동대문시장


 



    ... 부르디외는 벤야민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로 설명하지 않은 점입니다. 물론 부르디외도 경제적 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중층결정’의 의미에서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d)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라고 하더라도, 돈만으로 이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 상류사회의 성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전시회에 다니고 미술품을 수집할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늦게나마 대학이나 대학원에 등록하여 명목분인 학위를 딸 수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인맥도 넓혀 나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그들이 곧바로 상류사회로부터 공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그들에게는 막강한 경제적 자본이 있습니다. 그래서 벼락부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세 가지 자본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에 온힘을 쏟고 나아가 가장 수준 높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을 보내지요.

    한국 사회의 경우 1970~1980년대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고도성장 그리고 강남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투기의 열품은 벼락부자를 많이 양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갑자기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했겠지요. (중략)

    그렇다면 하루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은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취향은 사회공간을 차지하는 개인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그래서 취향은 사회적 방향감각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사회 공간 내에 주어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그들의 재산에 알맞은 지위나 그 지위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또한 사회 공간 내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배치될 경우, 그리고 또 그 상품과 제 집단들 간의 대응관계에 대해 다른 행위자들이 가진 실천적 지식이 주어졌을 경우, 사람들의 취향은 선택된 실천과 대상에 대한 사회적 의미 그리고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실천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1979 )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계급적 아비투스의 전형적 사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적 취향이 그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입니다.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중류나 하루계급 사람들도 흔히 하는 골프와 같은 운동이 한때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상류계급 사람들이 운동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서 골프를 선호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하류계급 사람들이 하기 힘든 운동이었기 때문에 골프를 선호했을 뿐입니다.

    상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 핸드백을 상류계급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그 핸드백이 튼튼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이 그들이 고가의 핸드백을 구매하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비싼 가격일 때 혹은 세일을 전혀 하지 않는 물건이 오히려 더 잘 팔리는 역설적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략)

    2007년 1월 12일 미국 워싱턴 랑팡 플라자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웃어넘기기 힘든 사진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죠슈아 벨(Joshua Bell, 1967~ )이 거리의 악사가 되어 남루한 차림으로 45분간 아름다운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비록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350만 달러를 호가하는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었지요.

    클래식 음악이 그 자체로 향유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조슈아 벨 주변에는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멈추어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은 달랑 7명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구걸함에 동전 한 닢이라도 던져 넣어준 사람은 27명에 불과했고 모금된 돈도 2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미적 취향이 얼마나 강하게 사회적 함의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조슈아 벨의 연주가 아무리 훌륭한들, 값비싼 연주회장, 매스컴의 주목, 저명인사들로 이루어진 환호로 이루어진 아우라가 걷히면 그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인 셈이죠.

   죠쥬아 벨의 여주를 들으러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고가의 입장료를 치르고 연주회장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고급 문화생활을 즐기는 상류계급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말에 트로트 쇼에 가는 사람을 보면, 중하류계급에 속할 거라고 간주하지요. 물론 이 판단은 부르디외의 말대로 우리에게 이미 ‘상품과 제 집단들 간의 대응관계에 대해 다른 행위자들이 갖는 실천적 지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이런 실천적 지식, 즉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타인들이 문화적으로 선호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어렵지 않게 예측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은 중하류계급 사람들이 목돈이 생겼을 때 조슈아 벨의 클래식 공연장에 가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스스로 상류계급 문화를 연출함으로써 상류계급에 편입되고 싶다는 자신의 은근한 소망을 드러내는 셈이라고 할까요.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7 23:51 2010/06/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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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1/05/23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이우 곽원효 2011/05/24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맞습니다. 발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