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운길산 수종사
... 석가는 우리에게 아주 기이한 관념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현실의 문제를 풀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보타바루와 석가의 문답은 석가의 사유 태도가 얼마나 실제적인지 잘 보여준다.
보타바루 : 세존이시여,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계는 무상한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사람은 죽은 뒤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일들을 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옳음이 없고 법에도 맞지 않으며 수행과도 관계 없기 때문이다. 집착을 끓고 욕심을 버리고 바른 지혜를 얻어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을 원인을 설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 (중략)
‘마하’는 ‘위대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다. ‘반야’는 ‘지혜’이다. ‘바라밀다’는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위대한 지혜로 건너가는 <<반야심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세음보살은 깨달음을 얻고자 깊은 선(禪)에 잠겼을 때(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불(佛), 붓다(Buddha)가 뭐냐? 붓다는 ‘깨달은 자’이다. 보살(菩薩), 보디사트바(bodhisattva)가 뭐냐? ‘깨달음을 얻었으나 열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생과 더불어 사는 자’이다. (중략)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舍利子 色不異空 色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중략)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도 의식도 그러하다(受想行識 亦復如是).”
<<반야심경은>>은 우리에게 직설한다. ‘색’이란 무엇이냐? 우주의 삼라만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색’이다.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과 의식도 ‘색’이라고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직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엇인가? ‘공’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색’이 무엇인지 바르게 정의하는 데 있을 것이다.
‘색’이 무어냐? 색깔이냐? 만일 ‘색’이 색깔이라면 ‘공’은 ‘무색’일 것이다. ‘색’이 무어냐? ‘단풍잎’이냐? ‘색’이 단풍잎이라면 ‘공’은 낙엽일 것이다. 아닌 것 같다. 영어 <<반야심경>>에서는 ‘색’을 ‘form’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 ‘공’은 ‘formless’일 것이다. 그런데 영어 <<반야심경>>에서는 ‘공’을 ‘empty, void’라 번역하고 있다.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 이 방 안은 고요하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려 보자. 소리가 난다. 이내 고요해진다. ‘소리’가 색이라면 ‘고요’는 공일 것이다. 사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 그리고 소멸하여 돌아가는 자리가 ‘공’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자의 ‘허(虛)’에 해당한다. 그러면 ‘공’은 무엇이냐?
“사리자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또한 공이라(舍利子 是諸法空相).”
어라? 지금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법’이다. 그런데 이 ‘법’ 또한 ‘공’이라네? 앞에서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과 의식’ 모두를 ‘공’이라 했고, 여기에서는 ‘진리’마저도 ‘공’이라고 한다. 하기야 ‘진리’라는 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그 무엇이고, 언어는 인간의 의식작용의 표현물인데, 인간의 감각이며 상념이며 의식이 모두 ‘공’이라면 우리가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의식 작용’도 ‘공’이요, 결과적으로 ‘진리’도 ‘공’이어야 하겠다.
“본디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더러워지는 것도 없고 깨끗해지는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는 것이다(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滅).”
어라? 좀 심하게 나간다.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고? 그런 세상이 어디 있담? 우주의 모든 사물은 생성과 소멸의 숙면 속에 갇힌 존재다. 태양도 100억 년 전에 태어나 앞으로 50억 년 후면 소멸한다고 한다. 모든 항성은 수소의 핵융합 작용에 의해 별로 태어나서 늙으면 적색 거성(red giant)이 되었다가 밤하늘의 불꽃처럼 초신성(supermova)으로 터지다가 사라지는(fade away) 운명을 걷는다. 그런데 본디 생긴느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고 한다면, 지금 관자재보살은 생성과 소멸의 우주의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색이 없고, 감각도 상념도 행동도 의식도 없다(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당연하지.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넘어선 곳에 무슨 색이 있을 것이며, 느끼고 표상하고 의지하고 분별하는 인간의 의식 활동이 있을 것인가?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감각의 의식은 본디 없는 것이요(無眼耳鼻舌身意)”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감각은 생물 생성 이후 나타나는 감각작용이고, 의식은 인간의 탄생 이후 존재하는 정신활동이다. 지금 관자재보살은 이 미시의 세계를 넘어서고 있다.
“빛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과 진리도 본디 없는 것이라(無色聲香 味觸法).”
빛은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생성된 물질이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은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보고 있다. 그곳엔 빛이 없으니 빛깔도 없다.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없다. 인간이 붙들고 있는 진리도 본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요, 이어 의식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와, 징하다. 어디까지 없는 것이라고 ‘부정의 사유’를 펼칠 것인가? 시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라, 그렇지. 텔레비전이 안방에 들어오면서 우린느 드라마의 노예가 되었지. 본디 텔레비전계(界)가 없었잖우? 청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라, 그렇지. 이놈의 휴대폰 때문에 시도 때도 없는 소음 공해에 붙들려 살고 있는데, 본디 휴대폰계는 없었던 것이지? 우리가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이제 우리는 눈뜨면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마주한다. 그렇지. 본디 인터넷계도 없었던 것이다. 10만 년 전 인간에게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던 그 시절에는 의식계도 없었을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는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워메, 지혜도 깨달음도 모두 ‘공’이라고? 소크라테스여, 그대가 죽는 날까지 추구한 이성적 사유니 진리니 지혜니 하는 것들 다 ‘공’이다. 공자여, 그대가 죽는 날까지 탐구한 도(道)도 다 헛 것이라. 지금 관자재보살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사유의 극한, 부정 정신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어졌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어져 뒤집힌 몽상들을 훌훌 털고 마침내 니르바나에 이르렀던 것이다(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 부정의 극한에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알 수 없다. 알아도 표현할 수 없다. 불립문자. 깊은 선의 경지에 들어야 체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은 필설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라고 흔히 가르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직설한다. 그것은 무애(無碍),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도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인간의 의식 속에 새겨진 모든 전도된 몽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장자가 호접몽(胡蝶夢)의 우화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경지였을까? 플라톤이 동굴 속의 죄수에 비유하여 이승에 붙들린 우리의 몽상을 질타했던 그 경지였을까? 마음의 공포, 의식의 몽상을 다 지우고 나면 마침내 이르는 곳, 그곳이 니르나바, 열반(涅槃)의 경지이다. 그곳은 아무런 소음이 없는 곳이란다. 그리하여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는 이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若三菩提).”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를 설정한다. 기독교의 여호와와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초월적 절대자다. 초월적 절대자를 사람들이 잘 모르니 예수가 구원자로 오고 마호메트가 중재자로 오는 것이다. 부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하략) ...
- 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 지식하우스,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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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심경>> :
<<반야경>>의 핵심 내용만을 갖추려 요약한 경전으로 <<반야심경>> 또는 <<심경>.이라고도 한다. 260자의 짧은 글로 <<반야경>>을 요약하고 있지만, 내용 면에서 경전의 속뜻을 가장 발 반영해 가장 심오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대표되는 공(空) 사상은 어떤 사물이든 고정된 상이 없으며, 보살은 오직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 최고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야심경 전문]
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味觸法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 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애 무애고 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若三菩提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주 是大明주 是無上주 是無等等주 能除一切苦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眞實不虛故說般若波羅蜜多 주卽說주曰,
진실불허고설반야바라밀다 주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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