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 Photo/풍경'에 해당되는 글 289건

  1. 2011/11/28 이우 곽원효 사회계약론 : 토머스 홉스 Vs 데이비드 흄
  2. 2011/11/03 이우 곽원효 사랑_ 헤겔 Vs 바디우
  3. 2011/07/28 이우 곽원효
  4. 2011/05/13 이우 곽원효 법가(法家)
  5. 2010/06/28 이우 곽원효 리스본행 야간열차 Vs 남한산성
  6. 2010/06/27 이우 곽원효 교환_ 보드리야르
  7. 2010/06/23 이우 곽원효 소비, 자본주의 생산성의 비밀_ 보드리야르
  8. 2010/06/23 이우 곽원효 자본의 시간과 공간_ 보드리야르
  9. 2010/06/09 이우 곽원효 시장과 기아_ 징 지글러
  10. 2010/06/09 이우 곽원효 정치와 기아_ 징 지글러
  11. 2010/06/09 이우 곽원효 희망은 '인문’_ 징 지글러
  12. 2010/06/01 이우 곽원효 반야바라밀다심경_황광우
  13. 2010/05/31 이우 곽원효 유토피아_토머스 모어
  14. 2010/05/21 이우 곽원효 물옥잠_ 김성대
  15. 2010/05/03 이우 곽원효 제석소견처_ 최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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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낙산 / Photo by 이우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급변하던 시기는 국가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급변기에 정점으로 이루어졌던 국가 질서가 여지없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국가를 정당화하는 논의들이 모두 예외없이 사회계약론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로크도 홉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한다고 이해했다. 물론 홉스의 말대로 그 순간 자유로운 개인들은 주권자의 지배를 받는 ‘국민’으로 전략하게 될 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발적인 복종’이라는 환각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홉스


  사회계약론에 입각하여 국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최초의 근대철학자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자신의 주저 <리바이던(Leviadan))>에서 그는 ‘자연상태’ 및 ‘국가권력’과 관련된 흥미로운 논증을 제안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외부의 강력한 위협으로부터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강한 불신이 갈려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타인과 그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더라도, 우리는 타인도 나와 같은 다짐을 하리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상태는 홉스에게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은 ‘전쟁상태’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상호 불신과 선제공격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보존하기 어렵게 된다. 홉스는 이 상황으로부터 모든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켜 줄 공통적인 권위, 즉 주권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묘사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상태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 개인들의 상호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권력을 한 곳으로 모아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리바이어던, 즉 ‘국가’가 탄생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가 타당하다면, 인간은 드디어 국가라는 공통적 권위에 의해 무질서와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문명상태’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게 된 셈이다.



  흄


  불행히도 역사는 홉스의 전망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절대주권 자체가 오히려 자신에게 권력을 양도한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망을 억누르고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은 절대주권의 공권력에 의해서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주권 사이에서 진행되는  갈등은 대규모 절멸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자연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개인 사이의 갈등보다 더 참혹하고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실 사회계약론의 입장에서 국가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논리에는 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과연 인간이 자신의 권력, 즉 힘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의 권력은 원칙적으로 타인에게 양도할 수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이 타당하려면, 우선 모든 사람이 정말로 합의를 통해서 국가를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러한 원초적 합의에 대해 경험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은 오래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역시 마찬가지다. 홉스가 말한 국가 없는 상태, 즉 자연상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자신의 생명조차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극도의 아만적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강제력과 공권력을 가진 국가의 탄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하나의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던 시절, 그것이 단지 하나의 허구에 불과했다고 공격했던 다른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험론자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다. 그의 짧은 논문 <원초적 계약에 대하여(Of the Original Contracts)>에서 흄은 인간이 결코 자유로운 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 살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어떤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비자발적이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국가나 사회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지면서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흄의 지적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들이 몸담을 공동체를 선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비참함이 극복되지 않을 경우 이러한 부자유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 강신주의 <철학 대 철학>에서 정리하였습니다. )


2011/11/28 12:41 2011/11/2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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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남산공원_ 후암동 방향/ Photo by 이우


 

헤겔(객관성/동일성) Vs 바디우(주관성/비관계와 탈결합, 탈주)



  …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함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 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 (중략)  …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결혼을 통해 비로소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이들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게 된다. …( 헤겔의 <법철학 강요> 중에서 )

vs

  …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갖어되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설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희생적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後) 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 바디우의 <조건들> 중에서 )


  … 사랑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성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 중에서 )  






2011/11/03 21:52 2011/11/0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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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Photo/풍경 2011/07/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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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왜목마을














 

2011/07/28 12:47 2011/07/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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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두물머리






   법가(法家)는 실용적인 정치 철학이라 명명할 수 있다. 전국(戰國)시기, 춘추(春秋) 후기에 노예의 끊임없는 폭동과 봉건 지주계급의 흥기로 인하여 기존의 노예주 귀족계급 통치를 유지하였던 "예치(禮治)"가 점차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가의 "예치(禮治)"사상에 대립하여 각 제후국에서는 변법을 통하여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풍조가 출현하였다.

  전국(戰國) 초기에 위(魏)나라의 재상 이회(李? , 약 B455~BC395)는 ≪법경(法經)≫을 편찬하고 솔선하여 위(魏)나라에서 변법(變法)을 단행하였다. 계속하여 오기(吳起, BC 약 440 BC 381)는 초(楚)나라에서 법률을 개편하였다. 전국(戰國) 중기에 상앙(商? , 약 BC390~BC338)은 진(秦)나라에서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또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 조(趙)나라의 신도(愼到) 등도 모두 자국에서 연이어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국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가들로 잔존해 있던 노예주 귀족계급의 정치 경제통치를 청산하고, 봉건적인 정치 경제제도를 확립 발전시키기 위해서, "변법(變法)"을 통하여 구귀족의 정치에 대한 전횡을 타파하고 관료정치로써 귀족정치를 대체하여 국가권력을 봉건군주에게 집중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걍력한 제도와 법령을 공포해서 전국의 모든 사상을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以法治國)"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강력하게 실행하였던 이러한 정치가들의 사상 이론과 실천은 각종 사조(思潮)가 격렬하게 경쟁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주장은 "법치(法治)"를 핵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법가(法家)"라고 일컬어진다.


  한비자는 신불해, 신도, 상앙 등의 초기 법가사상을 종합하여 "법치(法治)"를 중심으로 삼고 법(法), 술(術), 세(勢)가 서로 결합된 관점을 주장하였다. 한비는 "술"만 언급하고 "법"을 중시하지 않은 신불해와, "법"만 언급하고 "술"을 중시하지 않은 상앙의 사상은 모두 군주의 통치에 불리하므로 정확한 방법은 법, 술, 세 삼자를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비자는 먼저 정권의 천하통일에 유리한 준칙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法, 군주는 인민을 통제하는 공개적이고 자세한 규칙)"이었다. 그는 사회가 모두 반드시 "법"을 준수해야 하며 누구든지 "법"을 위반하면 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령을 "명(名)"이라 하고 법령에 의거하여 상벌을 가하는 것을 "형(刑)"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형명지술(刑名之術)"이다.

  한비자는 또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술(術, 신하들을 지배하는 은밀한 방식)"도 필요한데, "술"은 군주가 "법"에 의거하여 관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법"은 공개된 것이고 "술"은 은폐된 것이며 "술"이 있으면 국왕은 정권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법"과 "술" 외에도 한비는 "세(勢, 인민과 신하를 굴복시키는 힘)"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세(勢)"란 바로 정권이며 "승세(乘勢, 세를 타는 것)"는 바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는 신도의 "중세(重勢)"설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세(勢)"를 "자연지세(自然之勢)"와 "인위지세(人爲之勢)"로 구분하고 "인위지세(人爲之勢)"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와 "법"을 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BC 475~221)에 한비자(韓非子)의 영향을 받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BC 221~206)의 이념적 토대를 이루었다. 법가는 인간의 실제행동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백성이 통치자의 미덕을 인정한다고 해서 사회적 화합이 보장되지는 않으며,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가는 특정한 행동에 대해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를 내세워 정부를 옹호했다. 또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진나라는 이 정책을 가혹하게 실행했기 때문에 결국 15년 만에 무너졌고 불신 받게 되었다.







2011/05/13 18:02 2011/05/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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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남한산성






    ... 아마데우가 막 잠이 들었을 때, 아드리나아의 귀에 한낮의 고요함을 찢는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옆집 대문 앞의 계단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를 에워싸고 서서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요란하게 손짓을 했다.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신발 끝으로 쓰려져 있는 남자를 걷어차는 것 같았다. 키가 큰 남자 둘이 사람들을 밀치고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병원 입구까지 들고 왔다. 그제야 남자를 알아본 아드리아나는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전단에서 본 멩지스였다. 사진 아래 ‘리스본의 인간 백정’이라고 적혀 있던 사람. (중략)

     오빠는 돌처럼 굳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멩지스를 내려다봤어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창백했던 그의 얼굴을요. (중략) 털이 난 가슴에 먼저 귀를 대고 들은 다음, 내가 건네준 청진기를 가져다 댔어요. ‘강심제!’ 오빠는 이 한 마디만 했어요. 꽉 눌린 그 목소리에는 억누르는 증오가 번쩍이는 칼날처럼 묻어났어요. 내가 주사기에 약을 넣을 동안 오빠가 심장마사지를 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주사기를 건네줄 때 우리 시선이 아주 잠깐 마주쳤어요. 그 순간 오빠가 얼마나 안터까웠던지! 그때 오빠는 냉철하고도 완고한 의지로 진찰대에 누워 있는 이 살찐 땀투성이 남자, 사람들이 모두 고문과 살인과 국민에 대한 잔인한 억압의 책임자라고 짐작하는 그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있었어요.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죠.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 몇 초 동안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충분했으니까요! (중략)

     갑자기 ‘배신자! 배신자!’라고 외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들것에 실린 멩지스가 살아 있다는 걸 보고, 마땅히 죽었어야 할 그를 살린 사람을 정당한 심판을 져버린 배신자로 생각하고 분노를 이쪽으로 돌린 거예요. (중략) 오바가 문을 열자 고함 소리가 사라졌어요.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채 한참 동안 서 있었어요. 사람들은 오빠가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하길 기다렸지요. (중략)

    ‘난 의사요.’ 오빠는 이렇게 말하고, 맹세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말했어요. ‘난 의사라고요.’ 난 근처에 살면서 우리 병원에 다니는 환자 서너 명을 알아봤어요. 이 사람들은 당황하여 땅바닥을 내려다봤어요. ‘그자는 살인자요!’ 누군가 외쳤고, 다른 사람들도 ‘인간백정!’이라고 소리쳤어요. 오빠의 어깨가 힘겹게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에요.’ 오빠는 크고 또렷하게 말했어요. (중략)

    그러자 누군가 바로 토마토를 던졌어요. 그 토마토는 오빠의 흰 가운에서 터졌어요. 9중략) 어떤 여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오빠 앞에 서더니 얼굴에 침을 뱉었어요. (중략) 그 여자는 마치 몸에서 영혼을 뱉어내듯이 여러 번 계속해서 침을 뱉었어요. 더러운 침은 오빠의 얼굴을 적시고 아래로 서서히 흘러내렸어요. (중략)

    ...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롱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나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문과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자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멩지스가 눈앞에 누웠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
 

-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 열차1>>(들녘, 2007) 중에서


Vs




     ... 김상헌은 혼자서 떠났다. 그의 행장은 가벼웠다. 책과 벼루를 버리고, 미숫가루 다섯 되와 말린 호박오가리 열 근을 챙겼다. 말을 배불리 먹이고, 두꺼운 솜옷에 털모자를 쓰고 환도를 허리에 찼다. 김상헌은 삼각산을 서쪽으로 돌아서 송파나루로 향했다. 송파에 이미 적이 들어와 있으면 더 상류로 올라가 와부에서 강을 건널 작심이었다.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프레 열렸다.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중략)

    강이 얼어서 나룻배 두어 척은 강가에 묶여 있었다. 청병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청병이 다가온다는 소문에 나루터 마을은 흩어졌다. 남대문에서 방향을 돌린 어가행렬이 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널 것이고, 청병은 임금의 뒤를 쫓아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주인 없는 개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김상헌을 향해 짖다가 달아났다. 빈 마을에 늙은 사공이 한 명 남아 있었다. 김상헌은 사공의 초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사공의 어린 딸이 끓는 물에 미숫가루를 풀어서 내왔다. (중략)

    - 강을 건너시렵니까?
    - 그렇다. 어젯밤에 어가행렬이 여기서 강을 건넜느냐?
    -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모두 걸어서 건넜습니다. (중략)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에…….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중략)
    - 내 말을 주마. 오늘 나를 건네다오. (중략)
    - 말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 순한 말이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가져라. (중략)
    - 고마우신 말씀이나, 천한 사공이 배를 타지 어찌 말을 타리까. 더구나 눈이 쌓여 말먹이 풀을 구할 길이 없으니…….

    사공이 김상헌의 발 아래 엎드려 가죽신에 새끼로 감발을 쳐주었다. 김상헌은 사공을 앞세우고 얼음 위로 나섰다. 겨울강은 물이 낮아서 물가 쪽으로 바위가 드러났다. 낮 동안 햇볕을 피해 구불구불 얼음 위를 건너갔다. 마주 보이던 나루터 마을도 비어 있었다. 돌무더기로 쌓은 선착장에서 부서진 배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김상헌은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 나는 남한산성으로 간다. 나를 따르겠느냐?
    - 아니오. 빈집에 어린 딸이 있으니…….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이다.
    - 그럼 가거라. 고맙다.
    - 산성까지 여기서 한참이오.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길이 가팔라도 서문이 가깝소. (중략)

    김상헌은 사공의 목덜미며 몸매를 찬찬이 살폈다. 야위고 가는 목에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었다. 힘줄은 힘들어 보였다. 밤새 강물이 굳게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이도 강을 건널 것이고,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다. 십만이라든가 십오만이라든가, 대병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이고, 그 사나흘 동안 강물은 얼고 또 녹을 것이다.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버려진 말이 길게 울었다. ...

- 김훈 소설 <<남한산성>>(학고재, 2007)




 

2010/06/28 10:29 2010/06/2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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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광덕산





    ... 나 자신 혹은 나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이나 원인을 위해서 희생되어도 좋은 상품, 도구 , 혹은 기호로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스스로를 더 고상하고 훌륭한 다른 목적들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할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 놓은 집어등에 사로 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마치 선사(禪師)가 사자후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 데서도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위해 이유, 원인, 목적성을 발견하는 것은 교환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장미 한 다발을 와인 한 병과 바꾸는 것이 바로 교환이지요. 그런데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모두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돈’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해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눈앞에 아름다운 진달래가 피었다고 했을 때 지금 보는 진달래는 사실 교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에 피었던 진달래가 아니고, 혹은 내년에 피어날 진달래도 아닙니다. 더구나 진달래를 꺾어다가 다른 종류의 책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진달래의 고유성과 책의 고유성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진달래 역시 교환 가능한 사물의 일종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진달래가 피어난 이유, 원인, 혹은 목적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진달래는 계절의 변화와 씨앗이라는 조건 때문에 피었을 것이고, 이 꽃이 핀 목적은 자신의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생물학적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달래는 존재를 몇 가지 환경 조건과 생물학적 이유들로 환원해버리면, 눈앞에는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어떤 분석의 대상 하나가 놓입니다. 이 상황에서 진달래의 아름다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꽆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겠지요.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려면 우선 인간의 추상적 사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추상적 사유는 결국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의교환 논리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가 수행했던 이성 비판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 보면 철학은 전통에 따라서 무관심을 표명한 것에, 즉 비개년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래 덧없고 사소한 것이라고 배척당하고 헤겔이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꼬리표 붙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양으로 격하된 질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으로 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1966)


    아도르노는 미래의 철학이 맡아야 할 임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앞으로 도래한 철학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그리고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철학이, 이성이나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해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프랑스의 해체론적 경향의 흐름을 선취한 인물이었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ida, 1930~2004)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도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 사유를 철저히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도르노가 꿈꾼 철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철학을 앞으로 세대가 공유한다면, 모든 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유해온 자본주의 논리도 어느 정도 해소될 지 모릅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배제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추상적 교환 논리는 사유나 이성을 통해서 고유성을 가진 사물들을 추상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감성의 구체성을 부정하고 이성의 추상성을 긍정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성의 추상성이 구체적 감성으로 포착되는 사물과 사건들의 생생함과 다양함을 부정한다면, 결국 추상적 교환 논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미적 감수성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7 22:53 2010/06/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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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동대문시장






     ... 좀바르트는 사치야말로 산업자본주의 발전의 핵심동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보드리야르도 소비야말로 생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나치게 지속적으로 영위한다면, 우리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소비생활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남길 수 없을 겁니다.(중략)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기는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는 M+△M이다. 다시 말하면 M'는 최초에 투입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초에 투입된 가치는 유통 과정에서 단지 자신을 본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변화시켜 잉여가치를 첨가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가치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야말로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해주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867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운동을 M-C-M'이란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M은 화폐(money)를, C는 상품(commodity)를, 그리고 △M을 유통을 통해 얻은 이윤, 즉 잉여가치(surplus value)를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중략) 이 공식을 유통과 생산과정 두 두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M-C-M'은 M-C ...... C'-M'라는 두 단계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때 M-C는 생산과정을, 그리고 C'-M'는 유통과정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핸드폰을 만들어 잉여가치를 남기는 회사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회사의 자본가는 처음에 일정한 자본금(M)이 있습니다. 그는 이 돈으로 핸드폰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재료들, 즉 노동자와 원료, 부품(C)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핸드폰(C')을 공장에서 상품으로 만들어냅니다. 물론 이 단계까지는 자본가의 의도대로 진행됩니다. 돈을 가진 것은 바로 자본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단계부터입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팔아 돈을 회수하는 과정은 자본가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닙니다. 자본가는 엄청난 양의 핸드폰이란 상품이 있지만, 이때 돈을 가진 것은 소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가진 사람이 월등히 우월하다는 자본주의 원리는 생산과정이나 유통과정에서도 그대로 관철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핸드폰을 만들어낸 자본가의 고뇌는 사실 단순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품을 팔아서 소비자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을 내 수중에 넣을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비자들은 이미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가는 소비자들이 이전에 구입한 핸드폰을 버리고 새로운 핸드폰을 다시 사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과제를 완수해낼 수 없다면 자본가에게는 치명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 뻔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소비자를 유혹하는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바로 기호가치와 관련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새로 생산해낸 핸드폰에 가장 소망스러운 기호들을 각인시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각종 대중매체와 대중 스타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전략으로 현실화되겠지요. 이제 핸드폰에 새겨 넣는 새로운 기호들은 이 핸드폰을 구매한 소비자들이 사랑받고 주목받는다는 이미지로 수렴됩니다. 만약 이러한 유혹이 성공한다면, 산업자본은 수많은 핸드폰을 팔고 원하던 잉여가치를 남기겠지요. 핸드폰만 성공적으로 팔린다면 막대한 광고료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소비자가 구매한 핸드폰 가격에 이미 예상 광고료를 포함했을 테니 말입니다.

    자본가가 생산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결코 잉여가치를 남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입니다. 보르디야르가 생산이 아닌 소비의 논리에 집중했던 이유도 여기 있지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길 수 있는 지점이 유통과정, 즉 ‘상품-화폐(C'-M')의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까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강조할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중략)

     사실 과거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는 행복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공장에서 만든 상품들을 글자 그대로 항상 새로운 제품이었지요. 예를 들어 영국의 값싸고 질 좋은 섬유제품이 생산되자마자 영국 사람들에게 바로 소비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가지 않아 영국에서는 팔리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여러 섬유제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마침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은 아직 산업자본주의를 모르던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요. 이것은 산업자본의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식민지는 노동력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노동시장이며 동시에 소비시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지배를 통한 엄청난 잉여가치의 획득으로 팽창한 산업자본주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걸림돌을 만납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식민지 쟁탈전에 독일과 일본 등 후발 산업자본주의 국가가 덩달아 뛰어든 것입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1914~1919)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산업자본주의에 외적 팽창의 길 역시 제동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은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을까요? 자국의 소비자들에게 다시 눈을 돌린 것도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자국의 소비자들이 이미 구매한 상품을 폐기하고 새로운 상품을 계속 구매한다면, 구태여 산업자본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의 시대가 열린 진정한 이유입니다.(중략)

     산업자본은 욕망과 개성의 실현을 찬양하는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 허영심을 집요하게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기법들을 대중매체의 발달과 함께 고안해 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자중에”라는 슬로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신용카드의 사용과 폭발적 소비 증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중략)

     보드리야르는 소비자가 다름 아닌 노동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사회의 화려한 유혹에 물든 대부분의 소비자는 환각의 세계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불행하게도 돈의 고갈, 혹은 빚의 확대일 뿐입니다. 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빚을 갚기 위해서 그들은 노동자의 지위로 산업자본에 편입되어야 합니다. 이 상황이 되풀이될수록 그들은 자본가에게 예속되겠지요.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중략)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욕망조차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포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략)

     산업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분명 소비의 자유입니다. 돈이 부족하거나 아예 돈이 없을 경우 우리가 느끼는 부자유의 느낌, 심지어는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습니다. 우울할 때마다 백화점에 들려 쇼핑을 하는 여성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3 01:58 2010/06/2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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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안양예술공원






    ...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다른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를 표시하는 요소(signifying elements)’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symbol)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요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있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있고 욕망(desire)의 논리일 수도 있는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무의식적이고 유동적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와 사회>>. 1970 )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했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 떠나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략)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유행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유행이란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것이지요.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산업자본은 대중매체를 이용해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직접 광고나 드라마 및 영화와 같은 간접광고를 통해 자신이 만든 상품을 하나의 유행으로, 다시 말해 가장 모던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결국 산업자본과 대중매체는 완전한 공생관계를 형성한 셈입니다. (중략)

     왜 신문사나 잡지사는 구독률에 목을 맬까요? 왜 공중파 방송사나 유선 방송사는 시청률에 관심을 집중할까요? 왜 인터넷 사이트는 조회 수에 신경을 쓸까요? 구독률, 시청률, 그리고 조회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신문사의 고상한 기사들, 방송사의 매혹적인 드라마들, 인터넷 사이트의 유익한 정보들은 모두 소비자를 유혹하는 일종의 미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안하게 해주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 안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중략) 반면 자신의 신분이나 부유함을 나타내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나 고급 아파트는 대체 가능하겠지요. (중략)

     보드라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너머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와 영역”에서 사물은 ‘기호(sign)’의 가치를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호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거로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의 하나로 세탁기를 언급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합니다.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것은 세탁기라는 어떤 사물의 사용가치를 의미합니다. (중략) 하지만 보드라야르가 주목했던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 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가치를 ’기호‘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 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산업 자본은 계속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사용가치의 세계에 매몰됐다면 산업자본은 상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장 가동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달성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상품에 기호를 기호가치를 새롭게 불어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자본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대중매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소비자들이 기호가치가 옮아간 새로운 상품을 계속 사들이니까요.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이 아직 사용가치가 채 소멸되지 않은 수많은 상품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게 만드는 체계입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3 00:02 2010/06/2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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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서울 낙산





     ... 카림, 너 혹시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선진국에서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거나 해서 영양과잉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거꾸로 다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가고 있어. (중략)

     이해가 안가요. 우리 마을에서는 소들이 목초지에서 풀을 뜯잖아요. 여름이면 주라 산지의 초원에서 풀을 뜯고요. 소들이 왜 곡물을 먹어요? 우리 제네바 주에서는 전통적인 낙농법을 따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미국은 아주 달라. 소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갖는 방법으로 비육되지. 그래서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톤에 달한단다. 미국 중서부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소들이 온도조절이 되는 ‘피드 롯’이라는 거대한 시설에서 사육되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곡물사료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는구나. 물론 소들은 움직일 수 없지. 정해진 공간 내에서 그저 질서정연하게 서 있을 뿐이야. 이런 비육축사 한 곳에만 1만마리 이상의 소들이 수용되어 있단다.

     프랑스의 르네 두몽이라는 농학자가 연구한 바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피드 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많다는 계산이 나왔어.

     또 다른 문제는 세계시장에 비축된 식량의 가격이 종종 인위적으로 부풀려진다는 데 있어.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농산품 가격이 투기의 영향을 받는 것을 알고 있니? 미국 시카고의 미시간 호숫가에는 위압적인 건물이 솟아 있어. 바로 시카고 곡물거래소야. 세계의 주요 농산물이 거래되는 곳이지. 이곳에서는 몇몇 금융자본가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어. 사실 거래는 몇 안되는 거물급 곡물상의 손에서 결정돼. 그들은 몇 사람 안 되지만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앙드레 S.A(스위스), 컨티넨털 그레인(미국),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 등이야. 그들의 상업함대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전세계 곡물의 매매가를 결정하고 있단다. 토마스 상카라는 그들 곡물 메이저를 ‘화이트칼라 강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지. 신문의 경제면을 들추면 시카고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콩, 옥수수, 귀리, 밀, 쌀, 보리, 고구마, 카사버 같은 곡물들의 시장 거래가격을 볼 수 있을 거야. (중략)

     ... 국제적인 거래 가격은 어떻게 정해져요? 물론 이른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단다. 그러나 또한 일부 곡물 메이저와 그 밑의 투기꾼들의 조작을 통해서도 결정돼. 덤핑 전략이나, 또는 반대로 시장에서 상품을 거두어들이는 전략을 통해서 말이야. (중략)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근대화라는 원칙이지. 시카고 거래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차드, 에티오피아, 아이티 같은 가난한 나라의 정부가 높은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따위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매주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이지 ....


     - 징 지글러(Jean Ziegler)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고파스, 2009)






2010/06/09 03:34 2010/06/09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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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경북 구미 금오산





     ... 그(토마스 상카라)는 어떤 나라가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도 사회정의가 이룩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곧 근본적인 개혁에 나섰던 거야. 이미 말했지만, 당시 부르키나파소에서는 공무원 수가 3만 8,000명에 달했어. 턱없이 많은 인원이었지. 더구나 대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들은 종래의 지연과 혈연 등으로 똘똘 뭉쳐 있었지. 사실 1960년대 들어 형식적이나마 독립을 이룩한 아프리카 나라들의 사정은 대체로 이와 비슷했지. 행정조직은 거대하고 비효율적이었어. (중략) 이것은 젊은 혁명가들에게 정말 힘겨운 과제였어.(중략)

    상카라가 인두세 폐지에 이어 취한 조치는 개간 가능한 토지의 국유화였어. 그 전에는 마을의 운영책임자들이 마음대로 땅을 할당해주었지. 그러고는 그곳에 무엇을 경작해야 할지 명령하고 농사 일정을 결정하는가 하면, 파종과 추수 의식을 주관하고 돈이나 수확물, 혹은 강제노동이라는 형태로 대가를 징수했어. 그러나 토마스 상카라가 권력을 잡은 뒤로는 농업부서 토지대장을 작성했어. 토지는 각 가정의 수요에 따라 재분배되었지. 그래서 어떠한 강제적 징수도 없이, 농민들은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단다.

    정말 놀라웠지! 4년도 지나지 않아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었어. 국가지출도 줄었고, 그래서 자금이 도로나 상수도 건설, 농업교육의 보급, 지역의 수공업촉진 사업 등에 우선적으로 투자되었지.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다민족의 복잡한 사회구성은 한층 민주적이고 정의로워졌지. (중략)

     부르키나파소의 인구는 약 1,000만 명으로, 대부분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상카라의 개혁으로 불공평함이 없어지면서, 인간다움과 자부심을 되찾으며 웅대한 희망에 불타올랐던 거야. 이 희망은 서아프리카는 물론 중부아프리카 지역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했어. 부르키나파소가 경험한 개혁의 희망은 정치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이웃나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어. 코트디부아르의 우프에 부아니 대통령, 가봉의 봉고 대통령, 토고의 에야데마 대통령 등의 부패한 권력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지.

    이런 정권들은 하나같이 프랑스의 꼭두각시야. 프랑스 본국 정부의 일부 세력은 상카라의 개혁을반기지 않았지. 예언자는 살해되어야 했어. 상카라는 결국 자신의 동지이자 참모였던 콤파오레에 의해 살해되었지. 콤파오레는 현재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란다. 토마스 상카라의 죽음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죽음과 비슷해. 외국 세력의 조종을 받은 자국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잖니.(중략)

     상카라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커다란 희망도 깨졌지. 콤파오레 치하의 부르키나파소는 다시 보통의 아프리카로 돌아가고 말았어. 완연한 부패, 외국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 북부지방의 만성적인 기아, 신식민주의적 수탈과 멸시, 방만한 국가재정, 기생적인 관료들, 절망하는 농민들…...


     - 징 지글러(Jean Ziegler)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고파스, 2009)





2010/06/09 03:32 2010/06/09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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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남이섬


     ...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어.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자연재해, 기근, 종족 분쟁은 선진국의 정부나 국제적인 원조 기구, 국제여론 등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토지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빈민가의 인프라 정비도, 농업지원도, 우물파기 프로젝트도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버릴 응급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 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

     - 징 지글러(Jean Ziegler)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고파스, 2009)




2010/06/09 03:30 2010/06/09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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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운길산 수종사




    ... 석가는 우리에게 아주 기이한 관념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현실의 문제를 풀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보타바루와 석가의 문답은 석가의 사유 태도가 얼마나 실제적인지 잘 보여준다.

     보타바루 : 세존이시여,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계는 무상한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사람은 죽은 뒤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까?
     석가 :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 :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일들을 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옳음이 없고 법에도 맞지 않으며 수행과도 관계 없기 때문이다. 집착을 끓고 욕심을 버리고 바른 지혜를 얻어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타바루 :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석가 :       보타바루여,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을 원인을 설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 (중략)

     
      ‘마하’는 ‘위대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다. ‘반야’는 ‘지혜’이다. ‘바라밀다’는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위대한 지혜로 건너가는 <<반야심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세음보살은 깨달음을 얻고자 깊은 선(禪)에 잠겼을 때(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불(佛), 붓다(Buddha)가 뭐냐? 붓다는 ‘깨달은 자’이다. 보살(菩薩), 보디사트바(bodhisattva)가 뭐냐? ‘깨달음을 얻었으나 열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생과 더불어 사는 자’이다. (중략)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舍利子 色不異空 色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중략)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도 의식도 그러하다(受想行識 亦復如是).”

     <<반야심경은>>은 우리에게 직설한다. ‘색’이란 무엇이냐? 우주의 삼라만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색’이다.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과 의식도 ‘색’이라고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직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엇인가? ‘공’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색’이 무엇인지 바르게 정의하는 데 있을 것이다.

     ‘색’이 무어냐? 색깔이냐? 만일 ‘색’이 색깔이라면 ‘공’은 ‘무색’일 것이다. ‘색’이 무어냐? ‘단풍잎’이냐? ‘색’이 단풍잎이라면 ‘공’은 낙엽일 것이다. 아닌 것 같다. 영어 <<반야심경>>에서는 ‘색’을 ‘form’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 ‘공’은 ‘formless’일 것이다. 그런데 영어 <<반야심경>>에서는 ‘공’을 ‘empty, void’라 번역하고 있다.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 이 방 안은 고요하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려 보자. 소리가 난다. 이내 고요해진다. ‘소리’가 색이라면 ‘고요’는 공일 것이다. 사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 그리고 소멸하여 돌아가는 자리가 ‘공’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자의 ‘허(虛)’에 해당한다. 그러면 ‘공’은 무엇이냐?

     “사리자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또한 공이라(舍利子 是諸法空相).”

     어라? 지금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법’이다. 그런데 이 ‘법’ 또한 ‘공’이라네? 앞에서 ‘인간의 감각과 상념과 행동과 의식’ 모두를 ‘공’이라 했고, 여기에서는 ‘진리’마저도 ‘공’이라고 한다. 하기야 ‘진리’라는 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그 무엇이고, 언어는 인간의 의식작용의 표현물인데, 인간의 감각이며 상념이며 의식이 모두 ‘공’이라면 우리가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의식 작용’도 ‘공’이요, 결과적으로 ‘진리’도 ‘공’이어야 하겠다.

     “본디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더러워지는 것도 없고 깨끗해지는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는 것이다(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滅).”

     어라? 좀 심하게 나간다.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고? 그런 세상이 어디 있담? 우주의 모든 사물은 생성과 소멸의 숙면 속에 갇힌 존재다. 태양도 100억 년 전에 태어나 앞으로 50억 년 후면 소멸한다고 한다. 모든 항성은 수소의 핵융합 작용에 의해 별로 태어나서 늙으면 적색 거성(red giant)이 되었다가 밤하늘의 불꽃처럼 초신성(supermova)으로 터지다가 사라지는(fade away) 운명을 걷는다. 그런데 본디 생긴느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고 한다면, 지금 관자재보살은 생성과 소멸의 우주의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색이 없고, 감각도 상념도 행동도 의식도 없다(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당연하지.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넘어선 곳에 무슨 색이 있을 것이며, 느끼고 표상하고 의지하고 분별하는 인간의 의식 활동이 있을 것인가?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감각의 의식은 본디 없는 것이요(無眼耳鼻舌身意)”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감각은 생물 생성 이후 나타나는 감각작용이고, 의식은 인간의 탄생 이후 존재하는 정신활동이다. 지금 관자재보살은 이 미시의 세계를 넘어서고 있다.

     “빛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과 진리도 본디 없는 것이라(無色聲香 味觸法).”

     빛은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생성된 물질이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은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보고 있다. 그곳엔 빛이 없으니 빛깔도 없다.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없다. 인간이 붙들고 있는 진리도 본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요, 이어 의식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와, 징하다. 어디까지 없는 것이라고 ‘부정의 사유’를 펼칠 것인가? 시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라, 그렇지. 텔레비전이 안방에 들어오면서 우린느 드라마의 노예가 되었지. 본디 텔레비전계(界)가 없었잖우? 청각의 세계도 없는 것이라, 그렇지. 이놈의 휴대폰 때문에 시도 때도 없는 소음 공해에 붙들려 살고 있는데, 본디 휴대폰계는 없었던 것이지? 우리가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이제 우리는 눈뜨면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마주한다. 그렇지. 본디 인터넷계도 없었던 것이다. 10만 년 전 인간에게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던 그 시절에는 의식계도 없었을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는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워메, 지혜도 깨달음도 모두 ‘공’이라고? 소크라테스여, 그대가 죽는 날까지 추구한 이성적 사유니 진리니 지혜니 하는 것들 다 ‘공’이다. 공자여, 그대가 죽는 날까지 탐구한 도(道)도 다 헛 것이라. 지금 관자재보살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사유의 극한, 부정 정신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어졌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어져 뒤집힌 몽상들을 훌훌 털고 마침내 니르바나에 이르렀던 것이다(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 부정의 극한에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알 수 없다. 알아도 표현할 수 없다. 불립문자. 깊은 선의 경지에 들어야 체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은 필설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라고 흔히 가르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직설한다. 그것은 무애(無碍),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도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인간의 의식 속에 새겨진 모든 전도된 몽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장자가 호접몽(胡蝶夢)의 우화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경지였을까? 플라톤이 동굴 속의 죄수에 비유하여 이승에 붙들린 우리의 몽상을 질타했던 그 경지였을까? 마음의 공포, 의식의 몽상을 다 지우고 나면 마침내 이르는 곳, 그곳이 니르나바, 열반(涅槃)의 경지이다. 그곳은 아무런 소음이 없는 곳이란다. 그리하여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는 이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若三菩提).”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를 설정한다. 기독교의 여호와와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초월적 절대자다. 초월적 절대자를 사람들이 잘 모르니 예수가 구원자로 오고 마호메트가 중재자로 오는 것이다. 부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하략) ...
 

- 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 지식하우스, 2006) 중에서



................................
*<<반야바라밀다심경>> :

     <<반야경>>의 핵심 내용만을 갖추려 요약한 경전으로 <<반야심경>> 또는 <<심경>.이라고도 한다. 260자의 짧은 글로 <<반야경>>을 요약하고 있지만, 내용 면에서 경전의 속뜻을 가장 발 반영해 가장 심오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대표되는 공(空) 사상은 어떤 사물이든 고정된 상이 없으며, 보살은 오직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 최고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야심경 전문]

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味觸法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 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애 무애고 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若三菩提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주 是大明주 是無上주 是無等等주 能除一切苦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眞實不虛故說般若波羅蜜多 주卽說주曰,
진실불허고설반야바라밀다 주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2010/06/01 22:19 2010/06/0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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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서울 낙산성곽






      ... <<유토피아>>*의 제1부는 1500년 당시 영국 농민들이 겪던 처참한 삶의 현장을 고발한다.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양이 사람을 먹는다니…. 모어의 독한 풍자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가 살던 시대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영국 플랑드르에서 모직공업이 흥성하여 양모의 값이 폭등하자, 영국의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울타리치기운동(enclosure movement)은 대대손손 땅에 붙어 생계를 이어오던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추방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영지에서 노역을 제공하고 생산물을 바쳐온 농노들에 대해 영주들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무마저 포기한 것이다. 양을 키워서 떼돈을 만져보겠다는 영주들의 탐욕은 봉건적 관계를 해체했지만, 쫓겨난 농민들을 맞이할 새로운 생산관계는 예비되지 않았다. 오갈 데 없는 농민들은 부랑자로, 거지로 거리로 떠돌았다.

    부랑자는 잡히면 태형을 당한다. 달구지 뒤에 묶어놓고 몸에 피가 흐르도록 때렸다. 부랑자 두 번 잡히면 귀를 자르며, 세 번 잡히면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에 처했다. 1572년 엘리자베스 1세의 법령에 따르면 거지는 자신을 고용해주 고용주를 만나지 못할 경우 혹독한 매를 맞고 귀에 낙인 찍힌다. 재법인 경우 그들을 고용할 고용주가 있으면 살려주지만, 세 번 잡힐 경우 용서 없이 반역자로 사형에 처한다. 부랑자 약 7만 2000명이 헨리 8세의 통치하에 사형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서는 300명의 절도범이 교수대에 올랐다.(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하는 요인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양입니다. 예전에는 얌전하고 조금씩 먹던 유순한 양들이 이제는 무서운 식욕으로 사람까지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양들이 농촌을 삼키고 있다는 것은 독설이요, 풍자이다. 한 명의 욕심꾸러기 지주가 농토를 흡수해서 수천 에이커를 울타리로 둘러막음으로써 수백 명의 농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보라. 농민들을 추방하고 있는 영국 귀족들이 바로 범인이다. 교황도 왕도 공범이다. 지배층의 무위도식과 불의를 항해 삿대질하는 모어의 격노는 계속된다. (중략)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불운으로 넘기지 않고 잘못된 사회적 관계에서 찾고 있는 모어의 관점이다. 부랑자, 거지, 도둑의 비참한 삶이 그들의 개인적 불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줌의 부자들이 땅을 빼앗고 물건을 매점하여 대중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를 만들면서 통치자의 사유재산을 폐지했다. 그의 부부공유제는 정치 지도자의 청빈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부인이 있으면 사적 이익을 탐하게 되고, 사적 이익을 탐하다 보면 권력을 남용하고 국가의 공익을 외면하게 마련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이제 모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사회 전반에 걸쳐 사유재산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여 귀족과 교회의 ‘토지에 대한 사적 사유권’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재산이 사유되는 사회,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정의와 번영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것을 거부한 아르카디아에 법률을 만들어 주지 낳았던 것입니다. 모든 지성인은 건전한 사회의 필수 요건이 부의 균등 분배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지 않는 한, 부의 평등하고 정당한 분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모어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익’이라고 하는 인센티브가 없으면 사람이 나태해지며, 타인 노노동에 의한 속성을 나타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이고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폐지하지 않는 한, 귀족의 봉건적 지배권을 폐절하지 않는 한, 사회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중략)

     유토피아가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이는데 있다. 행복이 당신이 찾는 것이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데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이끈 사회주의자들은 하루 7시간, 주 40시간 노동을 주장했다. 토마스 모어는 500년 전에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있다. 놀라야 할 것은 우리의 무능이다. 500년 전과 비교하여 100배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현대적 생산 능력을 갖고도 하루 6시간 노동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은 1950년대 50시간을 투입하여 만든 물건을 지금 12시간의 노동으로 만들고 있다. 생산성이 4배 향상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의 생산성이 30이었는데 2000년도의 생산성은 200을 기록했다. 7배의 생산성을 기록한 것이다. 1980년대 우리가 주당 70시간을 일했다면 지금은 동일한 생산물을 주10시간에 생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생산성의 증대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창출한 가치가 그만큼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증대가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동자를 생산의 영역에서 축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임금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증대할수록 고용주의 해고 능력이 증대하는 것만큼 우리가 겪는 고통스러운 역설도 없다. 생산성이 2배로 증대되었는데 노동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되지 않으면 노동자 2명 중 1명은 일자리를 잃는다. (중략)

     “유토피아에선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열심히 일합니다. 유토피아에선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이므로 결핍의 공포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사라졌고 아울러 돈을 벌려는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금전 사용의 종말은 사기, 절도, 말다툼, 분규, 반란, 살인, 배신, 독살 등 많은 범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인한 불안, 긴장이 사라집니다. 가난, 그것이 돈의 결핍을 의미한다면 화폐의 소멸은 가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략)


 

- 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 지식하우스>>(2006) 중에서






.....
* 유토피아 :
     영국의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발표한 공상소설. 원제목은 <<최선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풍자를 통해 당시 영국 정치 경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이데 대한 해결책으로 토머스 모어가 꿈꾸던 이상 사회를 제시한다.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6시간 노동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자유롭게 보낸다.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고, 주민자치제가 실현된다.
      <<유토피아>는 르네상스 시기의 휴머니즘을 반영한 근대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본래 ‘유토피아(Utopia)’는 '없다‘라는 뜻의 ’u'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ia'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뜻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2010/05/31 14:50 2010/05/3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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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서울 낙산




     물옥잠
     김성대


     그녀들이 하얀 발을 내밀었고
     나는 번갈아 핥아주었다
     왼발의 여자에게선 복숭아향이 났고
     오른발의 여자에게선 장맛비 냄새가 났다
     새빨간 매니큐어의 밤
     발톱들이 무척이나 반짝거려 먼 별들도 비출 듯한데
     그녀들은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서
     물옥잠에 대해 말했다
     주렁주렁 꽈리를 튼 혹과 꽃들의 전
     성기에 대해
     부레가 부푸는 늪의 밤에 대해
     그녀들의 말은 스펀지처럼 가볍고 구멍이 많았지만
     귀기울려 듣다보면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철새가 날고 풀벌레가 울고 수초들이 자라
     나의 방은 고요한 습지로 변해갔다
     물옥잠의 자맥질에 밤은 깊어가고
     그녀들의 발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나는 달빛을 번갈아 핥으며
     새벽이 벗겨질 때까지 그녀들의 상상 속에 머물렀다

    
      * 2005년 창비 신인상 당선작





2010/05/21 20:36 2010/05/2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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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mm /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제석소견처(題昔所見處)
     최호(崔護)


    去年今日此門中(거년금일차문중) : 작년 그때 이 문 안에는
    人面桃花相映紅(인면도화상영홍) : 사람과 복사꽃 서로 붉었는데
    人面不知何處去(인면부지하처거) : 사람은 어디로 가고
    桃花依舊笑春風(도화의구소춘풍) : 도화만 봄바람에 웃고 있네






2010/05/03 15:59 2010/05/0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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